양식정자태극권

몸의 올바른 자세와 기(氣)의 원활한 흐름을 고요하고 부드러운
양식정자태극권의 동작을 통하여 느껴보세요.

양식정자태극권이란

정자 태극권의 창시자인 정만청 종사는 본명은 정악(鄭岳)이고 별호는 옥정산인(玉井山人)이며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어 만염(曼髥)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는 시·서예·그림·의술·태극권등 다섯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를 이루어 세인들로부터 오절노인(五絶老人)이라고 칭송 받았다.
선생은 유년시절 몸이 허약하여 관동대협 두심오(杜心五) 선생의 전인인 양암풍 선생으로부터 청홍문(淸洪門)의 십칠법(十七法)과 두부룰 쳐서 수련하는 기공을 배웠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태극권의 일대 종사인 양징보 선생으로부터 태극권을 전수 받았고 대대로 제자를 선택해 전수하는 도가(道家)의 비전(秘傳)인 도가단공(道家丹功)을 산서(山西)의 좌래봉(左萊蓬) 조사의 전인인 장흠림 사형에게 배웠으며 소회원 선생으로부터는 역경의 이론을 공부하였다.
그후 1938년 봄, 호남성 국술관 관장으로 재직할 때 ‘국술(國術:중국 무술)이 호남성 전지역의 대중운동으로 이루어져 선생은 태극권을 보편적으로 보급시키기 위하여 매 2개월마다 각 현의 관장 및 사범 40명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간의 절약을 위하여 양가 120여식의 권가(拳架)의 반복되는 동작과 비슷한 동작, 요결에 맞지 않는 동작을 삭제하고 나머지 동작도 요결에 꼭 맞도록 충실하게 보완하였다. 게다가 보법격식(步法格式) 및 미인수(美人手) 등 자신의 연구를 더하여 37식으로 개편해 ‘양가 간이 태극권(楊家簡易太極拳)’이라고 이름 붙여 보급하였다. 그러나 후에 동남아를 비롯한 미국·유럽 등 세계 각지로 널리 전파되면서 ‘정자 태극권’이라는 독자적인 문파로 형성되었다.

이 권법은 동작이 섬세·우월하고 지대한 탄성(彈性)을 내포하고 있으며 어떠한 태극권보다도 기공수련 및 체용(體用)에 있어 더 효율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또한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이 보다 쉽게 배워 익힐 수 있으며 태극권의 본질에 더욱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정만청 종사의 일화 중에서 한 가지를 소개한다. “선생이 사천성에 있는 영국 대사관의 초청으로 태극권 시범을 보였을 때, 마침 영국군 방문단이 와 있어 그들과 세 차례 시합을 했는데 선생이 한 번 손을 대기만 하면 그들은 몇 미터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후에 이 소식을 듣고 초청한 미국 대사관의 연합군 환영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화는 중국의 항전 기간 중에 있었던 사실로 이로 인하여 태극권이 전세계로 보급되는 효시가 되었다.

정자태극권의 석주지(釋主旨)

태극권 권법의 한 틀은 백이십여 동작에 달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복식(複式:반복되는 동작)이 많으며, 이 복식을 여러 번 반복하므로 하여 심신(心神)을 매우 소모하게 되고,
체용(體用)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에 대하여 몹시 회의(懷疑)적이다.

태극권 권법의 한 틀은 백이십여 동작에 달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복식(複式:반복되는 동작)이 많으며, 이 복식을 여러 번 반복하므로 하여 심신(心神)을 매우 소모하게 되고, 체용(體用)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에 대하여 몹시 회의(懷疑)적이다.
그 긴 권가(拳架)의 작용을 짐작해 본다면 세 가지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첫째, 배우는 사람들이 항심(恒心:꾸준한 마음)이 없으므로 동작을 많이 늘려 익히게 함으로써 연습 시일을 지연시켜 조금이나마 좋은 길로 이끄는 데 보탬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 태극권의 권식(拳式) 가운데에서 근본이 되는 중요한 동작을 여러 번 되풀이해 연습하게 함으로써 진보의 속도를 촉진하려는 것이다.
셋째, 혹 13식(十三式)의 권법 틀이 지나치게 짧아 운동량이 부족하다고 불만스러워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점으로 말한다면 이 모두 아직 요령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만약 끈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긴 권가(拳架)를 연습하게 하여 끈기가 생기도록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연습 기간이 길거나 짧거나 중단하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근본이 되는 중요한 권식을 여러 번 연습하려 한다면 그 권식만을 따로 뽑아 여러 번 연습하면 된다.만약 권법 틀이 너무 짧아 불만이라면 한 틀을 여러 번 반복해 수련하면 된다.
나는 권식(拳式)이 너무 많이 중복되는 것은 의의(意義)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신(心神)을 소비하게 되고 무익(無益)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늘 이 권법의 번잡한 부분을 삭제해 간단하게 하고 쉬운 동작으로부터 어려운 동작으로 진행되는 권가(拳架)로 고치려 했으나 번잡한 세상사로 인하여 오랫동안 이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내가 호남성 국술관 업무를 주관할 때 군인, 경찰, 학생, 민간인들이 훈련하는 국술 과정에서 태극권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 때문에 부득불 긴 권법을 삭제해 간결하게 하는 일에 착수하여 널리 보급하는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이는 강한 민족과 강한 국가 및 낡은 것을 진작시키고 쇠약해진 것을 흥기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나 배우는 사람들로부터 깊은 찬동을 얻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책을 짓게 된 것이며, 진실로 그 시기에 알맞게 만든 것으로 감히 이론(異論)을 세워 기이(奇異)함을 뽐내려 한 것이 아니다.
모쪼록 천하의 어질고 밝은 사람들은 이 점을 양해하고 지도해 주기를 바란다.

정만청 종사의 일대기

나는 젊은 시절 광려산에서 공부하며 한가한 날에는 고찰(古刹)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다 해회사(海會寺)라는 절에서 한 노승을 만났다. 그는 고향이 하북(河北)이고 여든 살 가량 되었으며 정오가 지나도록 식사를 하지 않았다. 얼굴빛은 어린 아이 같았으며 격투기에 정통했다. 사찰 뒤에는 오로봉(五老峯)이라는 산봉우리가 있었는데, 절벽 사이에는 석이(石耳:영지) 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남들은 버섯을 취득할 수 없었으나 노승은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소나무나 덩굴을 잡고 기어오르는 모습이 마치 원숭이가 민첩하게 움직이고 새가 나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후에 청성산을 유람할 때에는 상도관(常道觀)이라는 도교의 사찰에서 홍씨 성을 쓰는 도사를 만났다. 나이는 일흔에 가까웠다. 밤에 그가 의거하는 평상을 보니 이부자리와 베개가 없었으며 앉아서 조식(調息:양생하기 위해 호흡을 고르게 함)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 4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했는데, 수염과 머리카락은 옻칠한 것 같았고 목소리는 크고도 맑아 여음(餘音)이 있었다. 나는 평생 동안 이러한 기이한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염(曼髥:정만청) 선생을 포함해 세 사람을 만났다.
정 선생은 어린 시절 뛰어 놀기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 어떠한 일에건 관심을 두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총명하고 감정이 예민해 사물에 즉시 적응했다.

어느 날 위험한 벽 밑에서 놀 때 벽이 무너져 혼절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회생했는데, 의식이 갑자기 감소되고 폐에 병이 생겼다. 곧 스승을 따라 태극권을 배워 점차 의식이 회복되고 체력도 나날이 충만해졌다. 세월이 흐른 뒤에는 보통 사람의 건장함이 오히려 정 선생에 비하여 약해 보였다.
정 선생은 학문, 의술, 서화(書畵)를 깊이 연구해 터득하지 못한 것이 없다. 또한 유람을 좋아해 경치 좋은 깊은 산골이 있으면 비록 험준하다 해도 반드시 가보았으며 호랑이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정신과 기력이 쌓이고 마음이 평온하기 때문이었다.
정 선생은 훌륭한 의사이다. 그는 “약과 침으로는 병을 치료할 뿐이지만 태극권으로는 병을 물리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나라에 병자가 많다면 어찌 외부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비록 편리한 도구와 진기한 무기가 있다 하더라도 운용하는 장사(壯士)가 없다면 기계가 없는 거나 매한가지다. 공자도 “육예(六藝:예도, 음악, 궁술, 馬術, 서예, 수학)를 가르침에 궁술과 마술의 단련이 없다면 예도, 음악, 서예, 수학 또한 배울 수 없다”고 했다.
정 선생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음식과 일상 생활은 서양 사람들과 다르므로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적합한 운동이 있어야 하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온전하게 하려면 당연히 태극권을 선택해야 한다”는 지론을 펴며 사람들을 만나면 싫증내지 않고 입이 아프도록 되풀이해 설명했다.
전수한 제자는 만 명에 가까우며 그들의 재능에 따라 지도했다. 그러나 그 뛰어난 태극권의 효능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정자 태극권 13편》을 저술했다.
요점을 추려 조목조목 구분해 분명히 하고 옛부터 전승된 수련의 비법에 스스로 연구한 정수(精粹)를 추가해 남김없이 공개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손자병법 13편》을 누가 지었든 간에 용병(用兵)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감히 어느 누구도 그 책을 폐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만염 선생이 이 <13편>을 인용해 태극권에 이름한 뜻도 용병을 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자태극권 13편》을 병사들의 심신을 단련하는 교본으로 삼게 해 《손자병법 13편》의 권모(權謀:임기 응변의 꾀)의 쓰임과 표리(表裏)로 하고자 한 것이 아닐는지…… 하늘은 거듭 병을 내리고 있고 국가의 혼란함은 안정됨이 없으니 만염 선생의 마음씀 또한 대체로 알 수 있다. 적막한 사찰이나 인적이 뜸한 쓸쓸한 산에서 고요히 자신만을 지키며 나라의 존망과 세상의 성쇠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여 한층 더 훌륭하다.

정만청 선생의 고향은 영가(永嘉)이고, 성은 정(鄭)이며, 이름은 악(岳)이다. 자(字)는 만청(曼靑)이다. 옛날 제갈 공명이 관우의 아름다운 수염을 보고 찬미해 말하기를 “당신의 수염은 남의 수염보다 훨씬 아름답다”라고 했는데, 지금 그 뜻을 본 받아 전기(傳記)의 이름을 염(髥:수염)이라고 짓는다.

강서성 구강(九江)에서
민효길(閔孝吉) 씀.

대화가 정 종사님의 작품”준여”

사승(師承)

양가 7대, 정자 4대 전인

권범주, 이일권, 류승권, 김봉기, 이성일, 조원혁, 이종원, 최재붕, 김삼중,
최남호, 안진수, 신부용, 홍순길, 이민익, 최   환, 이지환, 차국훈, 오세홍
엄병수, 심윤태, 이영돈, 박정훈, 안용업, 한봉예, 박흥규, 안찬호, 김한규,
김재심, 강현규, 오승목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 조직도

이가인

권범주

류승권

김봉기

최남호

최재붕

홍순길

최환

이지환

엄병수

심윤태

이영돈

안용업

한봉예

박흥규

안찬호

김재심

김한규

강현규

오승목

회 장 : 박흥규
부 회 장 : 한봉예. 김한규. 강현규
전무이사 : 안용업
감 사 : 김삼중. 이지환 

이 사 :
이가인. 류승권. 김봉기. 최남호. 안진수. 이지환
홍순길. 이영돈. 엄병수. 심윤태. 이상중. 강금강
안찬호. 박정훈. 최관순. 허영수. 김재심. 조세연
안용업. 신동봉. 황원주. 이부생. 장일갑. 임병관
윤충노. 박영옥. 이동철. 고경자. 김수영. 오승은
장철규. 여동기. 김형찬. 김한경. 최윤호. 서창식
이상원. 최윤호. 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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