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5일
카오슝에 도착한 셋째 날,…
그 날은 단체 시합이 있는 날이어서 대회장에 가보니 후덥지근한 날씨를 능가하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타이뻬이에서 있었던 대회 보다는 작은 규모이고 체육관까지 작다 보니 연습할 곳이 없어서 더운 체육관 바깥에서 연습도 해야 하고 불편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번 대회에는 우리 팀원이 적은 관계로 대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출전하였는데, 아무래도 단체전 이다보니 호흡을 맞추는 시간이 부족해 그저 무사히 마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어서 빨리 한국에 더 많은 태극권 인구가 생겨서 많은 분들이 대회에 같이 참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한 순간이었답니다.
저녁에는 주최 측에서 마련한 저녁 만찬을 먹었습니다. 우리 테이블에는 네팔에서 온 세 명의 남자가 같이 앉았는데 한 사람은 스님이라 고기를 안 먹고, 그 중 두 사람은 술을 안마시고, 세 사람 모두는 말이 안 통했지만 전 세계 공통의 바디 랭귀지인 ‘미소‘로 자리에서 일어 설 때까지 화기애애한 분위를 가질 수 있었지요.
그 곳에서도 대만 사람들은 물론이고 각국에서 온 사람들 모두가 노래를 어찌나 좋아 하는지 계속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인도에서 온 소녀였는데, 고운 목소리로 노래방 기기에도 없는 자기 나라 고유의 민속 노래를 아름다운 멜로디로 불러서 수많은 앙콜 족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지요. 이찬 선생님도 갑자기 중국말로 노래를 하셔서 관중들을 깜짝 놀래키셨답니다.
대회 두 번째 날.
개인전은 역시 긴장이 많이 되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마음 속 깊은 곳의 욕심이 그렇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이 회장님과 안 사범님의 순서가 지나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작년만큼은 아니지만 손끝 발끝이 떨려왔습니다. 무사히 마치고 났는데 아쉽게도 또 4위…
곧 바로 제가 찍힌 동영상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3위가 될 가능성이 많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결과는 그렇게 나오질 않았지요.
이번 대회는 작년 대회보다 양가정자문파의 태극권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국 선생님과 그의 후계자인 왕금사 선생님의 파워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역이라 외국인들한테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점들이 보였습니다. 멀리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한테 음식으로는 후한 대접을 하였으나 태극권을 겨룰 때는 한 점의 양보도 없이 냉정하게 심사하는 것을 보고(물론 같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서운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선생님이 달라지면서 생길 수 있는 미세하게 다른 동작들에 심사의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요결들을 잘 지켜가면서 하는지를 보는 심사 기준에 중점을 두는 게 더 공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론 저의 부족한 점을 세세하게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어 앞으로도 꾸준히 하여 공력을 많이 쌓아야겠단 결심도 했지만요.
대만에 도착한 뒤로 계속 대접만 받아온 게 미안해서 점심때는 우리가 카오슝 분들을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상어지느러미 요리를 먹을 수 있었지요. 오전에 있었던 서운한 일들이 상어지느러미 요리 안에 다 녹아 들어가서 기분도 좋아졌습니다. 식도락은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가 없는 즐거움 중의 한가지 인가 봅니다. ^^
그렇게 카오슝에서의 마지막 저녁이 다가왔습니다. 저녁도 다시 왕금사, 이건휘 선생의 초청으로 조금 색다른 요리를 먹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제주도처럼 대만 아래쪽에 있는 벙구라는 섬에서 온 재료로 만든 해산물 요리였습니다.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맛있는 요리들이 우리의 허리 사이즈를 계속 늘려만 가고 있었습니다. ‘이젠 더 안 먹을거야’하는 마음을 다시 먹는 유혹으로 빠지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색다른 요리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처음 대만에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우리 일행의 얼굴에는 윤기가 좔좔(^^*)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가 무르익을 무렵에 국 선생님은 자신이 수년 전에 집필하신 <행공심법>이란 책에 직접 싸인 하셔서 우리 일행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하시며 나눠 주셨답니다. 어찌 보면 ‘살아있는 전설’이신 국 선생님과도 마지막 만찬이 될 지도 모르는 자리였습니다. 그 분과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여러 번 식사를 같이 하다 보니 같은 집안의 피를 나눈 사람들처럼 우리의 가슴 속은 따뜻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국 선생님과의 만남이 아쉽게 지나가고 있었답니다.
밤엔 야시장에 들르기도 하고 야시장에서 사온 맛있는 열대과일들을 먹으며 한 가족처럼 둘러 앉아 도란도란 얘기도 나눴지요.
우리 일행 중에는 이회장님 가족 다섯 분이 있었는데, 모두가 태극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대한태극권협회의 앞날이 밝아 보였습니다. 그 중 두 따님들은 어찌나 예쁜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지요. 작은 체구로 무거운 망원렌즈 카메라를 들고 종횡무진 하시던 유현오 강현주 회원님 부부도 감사한 마음과 함께 기분 좋은 동반자로 기억에 남습니다. 항상 그림자처럼, 코치처럼 같이 하시는 조원혁 전 회장님 부부도 새로 사 오신 디카로 좋은 사진 남겨 주셨구요. 야시장에서 목걸이를 싸게 샀다고 좋아하시던 안찬호 사범님의 해맑은 얼굴도 생각납니다. 하얀 모시한복을 입고 카오슝을 누비시던 이찬 선생님은 애국자이시자 저희의 영원한 노사님이시구요. 모자란 제자들을 데리고 이리 저리 다니시던 수고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이찬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어찌 그런 환대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날 아침은 그동안 계속 오가던 비구름이 말끔히 물러가고 모처럼 햇님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물론 너무 눈이 부시게 따가울 정도였지만요. 우리의 식탐은 마지막 날까지도 그칠 줄을 몰라 광동요리의 대표 격인 딤섬 요리 집을 들르고야 말았습니다. 여전히 만두는 우리들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입안에서 살살 녹아 주었답니다.
저녁쯤이 되어서 ‘다음에 대만에 올 때는 이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음식+ 태극권) 마음먹으며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