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월드컵태극권대회(관광기)

2008-12-17

김태우 사무국장님

대만에서 열린 세계태극권대회에 다녀왔다. 지난 2006년에도 참가하였으니 이번이 두 번 째다. 이번 대회는 입상에 대한 부담이 별로 없었다. 지난 2년 동안 안찬호씨와 오승목군의 실력이 월등히 향상되어 개인전에서는 이 두 사람이 당연히 메달을 딸 것이고, 단체전도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아 무난히 입상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대회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가며 느긋하게 관광과 대회 관전을 즐기고 올 심산이었다.

이번 대만 방문 일정 중 처음 이틀은 현지가이드가 주요 관광코스를 직접 안내하여 스케줄은 빡빡했지만 밀도 있는 여행이 되었다. 경기참가가 아니라 관광과 관전을 목적으로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대회장 안에서는 지난 대회에 비해 훨씬 여유가 있었다.

대만 공항에 도착하자 처음 우리를 맞이한 것은 후덕한 외모에 딱 봐도 성격이 좋을 것 같은 젊은 여자 가이드였다. 이 여자 가이드는 원래 현대음악을 전공했으나 여행사에서 일하다가 대만의 현지 가이드로 눌러 앉았다고 한다. 몇 년 동안 대만에 있었는지를 마지막 날까지도 비밀로 하여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20대로 보였고 발랄함과 낙천적인 성격으로 여행 내내 우리를 성실하게 안내해주었다.

처음 간 곳은 국립고궁박물관이었다. 이곳은 2년 전에도 관람을 하였지만 대만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고(故) 장개석 총통이 중국본토에서 중국공산당에 패퇴하여 대만으로 이주할 당시 중국 자금성에서 가지고 온 약 70만점의 보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소장품들은 한번에 모두 전시되지 않고 3개월에 한번씩 회전을 시킨다고 한다. 그러니까 언제 방문하더라도 새로운 전시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세계적인 소장품은 인기절정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인지 이번에도 감상할 수 있었다. 옥으로 조각한 배추와 상아 조각작품 등이 관심을 끌었다. 특히 상아조각품 중에는 3대에 걸쳐서 조각한 공이 있는데 17개의 공이 겹쳐져 있으면서도 하나하나가 회전이 되는 것으로 현재에도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조각할 수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 송, 명, 청대의 도자기 전시물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번에 함께 가신 조원혁 회장님께서는 속초에서 석봉도자기미술관을 운영하시는 도예 명인이셔서 가이드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다. 유럽의 어떤 이가 “중국도자기는 비색(翡色)이고, 고려자기는 비색(秘色)이다”라고 했다면서 고려자기의 우수성을 강조하셨는데 그 차이는 흙에 있다고 한다. 더 깊은 부분은 조원혁 회장님께 술 한잔 올리면서 직접 듣는 것이 더욱 생생할 것이라고 생각되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고궁박물관은 외부에서 보이는 엄청난 규모에 한번 놀라고 실내에 들어와서 한번 더 놀라게 된다. 실내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온통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는 다음날 우리가 방문한 화련 지방에서 대리석이 풍부하게 나기 때문일 것이다. 장 총통이 생전에 “대만의 2천만 국민이 모두 일을 하지 않더라고 화련의 대리석만으로 3년을 먹고 살고, 고산지대의 차만으로 2년을 먹고 살며, 고궁박물관의 입장료 수입만으로 1년은 먹고 산다” 말했을 정도라고 한다.

고궁박물관에 이어 충렬사 위병 교대식을 구경한 뒤 대만민주기념관(구 중정기념관)으로 향했다.가이드에 따르면 대만민주기념관은 1975년 장 총통이 죽은 뒤 그의 마지막 부인인 송미령여사가 모금하여 설립한 것이다. 본관은 흰색의 2층 건물로서 장 통총의 과거 사진과 생전 집무실, 그의 동상이 있고, 앞쪽 건물에는 음악당 등이 있다. 최근 여당이 국민당에서 민진당으로 바뀌면서 천수이볜 전 총통이 “장총통의 동상이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하여 한때 2층 창문을 봉쇄하였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기념관 안에는 장 총통이 과거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다.

저녁에는 용산사와 야시장을 방문하였다. 용산사는 타이페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1738년 청나라 점령시절에 중국 복건성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현재의 건물은 2차 세계대전 뒤 1957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때 폭격으로 사찰이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기둥만은 온전하였다. 그 기둥은 지금도 새로 지은 건물의 기둥으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는데 색깔이 전체적으로 검어 확실히 눈에 띄었다. 용산사는 독특하게 불교의 부처와 도교의 신들을 함께 모신 사원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있을 때 자신이 믿는 신에게 빈다. 예를 들어 사업을 잘되게 하는 신, 결혼하게 해주는 신, 시험을 잘 보게 해주는 신 등이 있어 가히 신들의 백화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용산사 사당 안으로 들어서자 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은 저마다 뭔가를 빌거나 제를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그날은 사람이 별로 없는 편이라고 했다. 의외로 젊은 사람들도 제법 사당에 있었는데 아가씨 하나가 혼인을 맺어주는 신 앞에게 빌고 있기에 살짝 사진을 찍었다. 가이드에게 대만사람들이 정말 진지하게 이런 신들을 믿느냐고 물었더니 대만사람들은 진심으로 믿는다고 한다. 어쩌면 이 도교 사원이야 말로 인간들이 바라는 바가 있거나 삶이나 미래의 불확실성이 있을 때 초인간적인 존재인 신을 만들어 내어 그에 의존하고자 하는 종교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삶의 이러저러한 부분들에 대해 신에게 빎으로써 자신의 분수를 알고 스스로 오만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고자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누군가 중국인의 주된 종교는 유교도 불교도 아닌 도교라고 하였는데 이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중국인의 정신문화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야시장은 용산사 길건너편에 있었는데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별로 볼만한 것은 없었다.

이튿날은 화련을 방문했다. 화련은 타이페이에서 3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다. 화련의 정형화된 관광코스는 태로각 방문, 고산족 민속공연, 대리석 공장 견학 등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태로각은 정말 가볼 만한 곳이다. 태로각은 화련의 석산 속에 있는 협곡으로 중부 횡단도로의 동쪽 끝까지 19km에 달한다. 가이드 말로는 이곳은 1950년대 장총통의 아들 장경국씨(장총통과 송여사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전 부인인 모택동의 사촌누나의 아들이다.)가 죄수, 군인, 원주민을 동원하여 만든 길로 원래는 산업도로로 만들어진 것이나 현재는 관광코스로 되어 있다. 산 전체가 대리석 덩어리다 보니까 굴을 뚫을 때 폭약을 쓰지 못하고 인부들이 일일이 정으로 뚫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역사(役事)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이들의 명복을 비는 사당이 협곡 속에 만들어져 있다. 협곡 양쪽의 절벽은 그야말로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난 듯 9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고, 협곡의 폭이 좁아 마치 산속에 갇힌 느낌이 들 정도였다. 또한 수분을 머금은 구름이 운해를 이루어 협곡 사이를 떠다니면서 몇 번씩이나 가랑비를 뿌리고 말기를 반복하며 절묘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일전에 고궁박물관에서 보았던 대만의 산수화 속 절경이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했다.

연자구(燕子口)라는 곳은 원래 절벽 군데군데 뚫린 굴에서 제비들이 산다고 해서 만들어진 이름인데 우리가 갔을 때는 제비를 볼 수 없었다. 환경오염이 심해지면서 새들도 떠났다고 한다. 사실 협곡을 따라 흐르는 회색의 강은 석회석 가루를 가득 담고 있어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강이며(사실은 단 한 곳 어도용문(漁跳龍問)이라는 곳은 맑은 물이 흐르면서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다), 협곡 양쪽의 절벽은 상당한 부분이 지금도 침식작용으로 표면이 부서져 내리면서 나무들을 붙들어 두지 못한 채 잡풀과 관목만이 무성했다. 이 잡풀들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잿빛 강으로 떨어져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 나오는 대리석과 옥이 건국 초기 대만을 일으켜 세웠고 현재도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참으로 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었다.

 

태극권 대회를 왔으니 태극권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이틀 동안의 관광을 마치고 난 다음날부터
이틀간의 대회 일정이 이어졌다.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탓인지 아니면 대회 주최측의 운영상 문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인원이 지난번 대회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첫째 날 13식과 37식 단체전은 별다른 실수 없이 잘 해냈다. 사실 연습량에 비해 정말 잘했다고 해야겠다. 비록 상은 타지 못했으나 다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었다. 다만 13식의 경우 예상과는 달리 2년 전에 비해 훨씬 많은 팀이 참가하였는데, 이로서 13식을 메달 유력종목으로 내세우는 이점이 하나도 없어졌다. 다음에는 37식만 준비를 하든지 그게 좀 아쉬우면 양가 계열의 정통 권가를 준비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다.

다시 보니 대만의 태극권 수준은 생각보다 그다지 높지 않았다. 물론 오래하신 분들 중에는 정말 잘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중적으로 보급이 되다 보니 평균적인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사실 우리 도관에서 이찬 선생님에게 37식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개인전을 하던 날은 대회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몸도 한번 못 풀고 바로 시합에 들어가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단체전에는 상을 타지 못했지만 그래도 개인전에서 메달들을 따 왔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 대회의 숨은 공로자는 정춘자 여사님을 비롯하여 홍사현씨, 구현진씨 등 관전목적으로 오신 분들이라고 하겠다. 이 분들은 대회에 선수로 참가하지 않으면서도 선수들이 시합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면서 짐을 챙겨주셨고, 시합장면과 수상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주셨다. 이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코미네씨도 빠뜨리면 안되겠다. 우리 도관에서 함께 몇 년을 수련했던 코미네씨는 몇 달전 남편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하였다. 우리 일행을 본 코미네씨는 마치 헤어진 가족을 본 것 마냥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대만에 와서도 일본 여성들과 함께 태극권을 배우고 있는 중인데 대만에서도 가르치는 선생마다 다 다르게 가르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권가의 모양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코미네씨는 37식 여자개인전에서 우승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코미네씨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 태극권을 계속 해나가고 친구도 많이 사귀기를 바란다.

 

이번 대만 대회의 백미는 먹을 거리에 있었다. 이틀간의 관광 일정 동안 차마 언급하지 못한 매끼 식사를 하면서 사람들은 슬슬 기운이 빠져가고 있었다.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약간의 불만과 불안까지도 있었을 것이다. 섬세하신 이찬 선생님께서는 대회 2일차의 저녁식사와 마지막 날 점심식사 스케줄을 잡으시느라 노심초사하셨다. 대회 첫날에는 협회에서 주최한 만찬을 즐겼다. 새우요리, 생선찜, 닭요리, 상어지느러미 등이 코스요리로 나왔다. 이찬 선생님께서는 협회 임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는데 우리 자리로 술을 가져다 주기도 하셨다.

2일째 저녁의 메인디쉬는 불도장(佛跳牆)이었다. 이곳도 코스 요리였다. 불도장은 한자 그대로 스님이 담장을 뛰어 넘는다는 뜻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불도장은 1870년대 청나라 복건성에서 처음 만들어진 음식으로 닭고기, 돼지고기, 돼지 위, 돼지 족발, 양고기 등 20여가지 이상의 재료를 소흥주 술항아리에 가득 채우고 약한 불에 오래 고아서 만든 것이다. 그 당시 연회장에서 이 음식을 맛 본 어떤 이가 즉흥시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찬탄하였다고 한다. 그 시를 한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항아리 두껑을 열자 그 향기가 사방에 진동하니 참선을 하던 스님도 이 향기를 맡고 담을 뛰어 넘네”. 이 때부터 이 요리를 불도장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한국에도 불도장을 하는 곳이 있다는데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먹어보았다. 위에 말한 재료가 들어간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주저하였을 지도 모르지만 뭐가 들어간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안심하고 먹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돼지기름의 느끼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약재의 향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냈다. 속이 든든해지면서 더운 기운도 올라왔다. 불도장은 꼭 한번 먹어보길 권한다. 불도장외에도 생선찜, 새우요리, 닭요리 등이 나왔는데 대만의 코스요리는 대개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 같다.

 

마지막 날은 장총통 부처가 살았던 사림관저를 방문한 뒤 샤오롱바오(대만식 만두요리)를 먹었다. 사림관저는 곳곳에 생태원, 원예관, 온실 등이 있고 정원이 특히 잘 가꾸어져 있었다. 송여사가 특히 장미를 좋아하여 장미를 많이 심었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장미꽃이 피어있지 않았다. 이날은 날씨가 너무 청명하여 산책하기 좋았다. 야외 웨딩촬영을 오는 커플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가이드 말로는 대만은 아직도 야외촬영을 많이 한다고 한다.

관저 안에는 유럽풍의 카페도 하나 있었으나 자리에 앉으려면 주문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막 카페를 지나갈 무렵 안에서는 Smoke gets in your eyes라는 노래가 재즈 풍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에 끌려 들어간 곳은 조그만 탁자 몇 개와 기념품도 판매하는 카페였는데 이곳에도 장총통 부처의 사진이 있었다. 장총통은 상당한 미남에다가 군인 특유의 강인함도 엿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젊은 시절 국민당에 들어가기 전에는 모던보이였던 것 같다. 송여사 또한 장총통의 네 번째 부인인데 여사는 당시 유부남이었던 장총통을 이혼시킨 뒤 결혼할 만큼 모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친의 친구인 손문과 결혼한 둘째 언니 송경령, 재벌집 아들과 결혼한 첫째 언니 송애령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신여성이 되어 중국에 돌아왔던 것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송경령은 원래 정치적인 이유로 장개석을 싫어하여 송미령이 그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송애령은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에 찬성하였다고 한다. 이 자매들의 행적은 사뭇 달랐다. 언니 송경령은 손문이 죽은 뒤에도 중국 본토에 남아 중국공산당에 헌신하였으며, 송미령은 장개석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하여 평생 그의 곁을 지키면서 대만의 발전에 기여했다. 중국사람들은 송씨 자매를 두고 “송애령은 돈을 사랑하였고, 송경령은 조국을 사랑하였으며,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송경령은 성격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온화한 편이었다고 한다. 아마 일련의 과정을 보면 소박하게 서민적으로 살았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에 비해 송미령은 적극적인 성격이면서 대만의 최고권력자의 부인으로서 최대한 품위를 갖추고 살았던 것 같다. 송경령은 부르주아로 태어나 서민으로 살았고, 송미령은 부르주아로 태어나 부르주아로 살았다.

이 자매들은 이렇듯 가는 길은 달랐지만 여자로서의 일생은 어찌 보면 비슷한 면도 있어 보인다. 둘 다 당시 최고의 매력남과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 하였으나 그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송경령은 손문이 위기에 빠졌을 때 몸을 바쳐 그를 구하는 과정에서 유산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송미령도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장개석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생의 끝에서 이 두 사람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대만을 포함한 중국 근대사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인물로 등장하는 이 사람들은 이제 세상에 없다. 우리는 단지 사림관저에 남아 있는 송여사의 흔적과 조그만 카페의 사진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상상해볼 뿐이다.

대만에서의 4박5일 일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바쁜 와중에도 박정훈씨와 강세훈씨가 단체전을 참가하기 위해 뒤늦게 와주었고, 제주도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계신 최환 회장님도 일행들을 이끄시면서도 개인전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목에 거는 노익장을 발휘하셨다. 입맛 까다로운 회원들을 이끌고 지도해주신 이찬 선생님께는 죄송한 마음과 더불어 고마움을 느낀다. 이영돈 전무님과 조원혁 회장님께서는 환상의 콤비로서 적지 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행기간 내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셨다. 어떻게 즐겁게 해주셨는지는 일일이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이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보면 자연히 알게 된다. 다른 분들도 그런 기회를 갖기 바란다.
이번 대만 대회에서 즐거움을 함께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내년 여름에는 대만 카오슝에서 정자태극권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국홍빈 선생님을 뵐 수 있는 몇 번 남지 않은 기회일 지도 모른다. 내년 여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뜨거워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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