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은 치우침 없는 유연함을 가르쳐 준다


이찬 대한태극권협회 창립자

2021. 04. 05 by 정리=최윤호 기자

오래전 일이다. 내가 영화판에 있던 젊은 시절의 일.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 들은 일이니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 영화판에는 파다한 웃음거리로 회자되곤 했다.

액션스타 박노식이 한창 전성기를 누릴 때였다. 어느 날, 그가 분주한 일정 속에서 촬영 스케줄을 잊어먹고 촬영에 나오지 않았다. 영화사의 제작부장은 스타라고 폼잡는다며 흥분할 대로 흥분해 직원과 함께 박노식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흥분을 극대화하면서 파장으로 몰고 갔다. 옆에 있는 직원에게 집을 불태워 버릴거라면서 휘발유를 사오라고 시켰다. 그러자 그 직원이 후다닥 휘발유를 사러 갔다는 것이다.

제작부장은 당연히 옆에서 참으라고 말려줄 것이라 생각하고 판을 키웠는데, 진짜 휘발유를 사러가자 당황한 것은 이제 제작부장. 불을 지를 수도, 폼잡으며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에 처한 제작부장이 어찌어찌 상황을 모면했다는 이야기다.

아, 옆에서 말려줄 줄 알았는데….

태극은 음과 양의 조화를 기본으로 한다.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고, 천지인이 어우러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한쪽에 치우침 없는 조화, 그것이 건강한 삶의 원리이다. / Lee Chan Taichi TV
태극은 음과 양의 조화를 기본으로 한다.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고, 천지인이 어우러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한쪽에 치우침 없는 조화, 그것이 건강한 삶의 원리이다. / Lee Chan Taichi TV


‘우리 편 아닌 사람’도 같이 수련하는 곳

우리 태극권도관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수련을 한다. 젊은 사람도 있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도 많이 수련하는 운동이니, 사회활동을 하다가 은퇴한 사람들도 많다.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던 사람들도 있다. 왕년에 한가닥하던 사람들.

그러다 보니 운동수련 이외의 영역에서는 의견이 다른 경우도 많다. 특히 요즘처럼 선거라도 진행되고 있는 시기엔 조마조마한 장면도 펼쳐진다. 다들 경륜이 있으니 충돌로야 번지지 않지만 그래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평소 정치적 입장이 갈려있는 사람들. 뻔히 알고 있으니 가능하면 정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 것이 좋다. 심판의 입장에서는 선수들이 룰을 정직하게 다 지켜 심판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 가장 좋다. 말릴 일이 아예 생기지 않으면 좋다는 말이다.

“선거 왜 해요?” 이렇게 묻지 말라고 선거의 심판이 말했다고 한다. 왜 그랬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냥 이렇게 말했다면 좋겠다 싶다. “선거는 원래 선수를 바꾸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선거는 내편 네편 서로 숫자 세는 게임이 아니라, 지금 선수가 잘하면 계속하게 하고, 못하면 선수를 바꾸는 선택일 뿐이다. 어떤 선수에게든 가끔은 말려주는 심판이 필요하다.” 선수에게도 심판에게도 때로는 말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태극권은 태극처럼 음과 양의 소용돌이침을 기본으로 한다. 양손을 둥글게 공 안듯 위치한 저 속에서 음과 양이 어우러지고, 굳건하게 땅에 디딘 두 발을 통해 천하의 기운이 몸 속에 살아오른다. / Lee Chan Taichi TV
태극권은 태극처럼 음과 양의 소용돌이침을 기본으로 한다. 양손을 둥글게 공 안듯 위치한 저 속에서 음과 양이 어우러지고, 굳건하게 땅에 디딘 두 발을 통해 천하의 기운이 몸 속에 살아오른다. / Lee Chan Taichi TV


강함만 추구하던 시절을 끝내준 태극권

나는 소림권과 태권도를 비롯해 강력한 무술들을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수련하면서 젊은 날을 보냈다. 싸움에는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진정한 고수가 되기 위해 심신이 무너질 정도의 수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만난 태극권. 이 부드럽고 유연한 무술, 자연의 순리가 곧 행신(行身)의 도리인 운동을 시작했다. 늘 극단을 걸었고, 다른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도 무섭다고 눈 마주치기 싫어하던 내게 변화가 왔다. 몸을 움직이는 방법이 달라졌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세상은 우리의 삶이 유연하고 자연스레 변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회는 우리에게 한쪽 편에 서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자신의 줏대, 자신만의 잣대가 없으면 휩쓸리기 십상이다. 태극권을 수련하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생활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이쪽과 저쪽이 따로 없고, 어우러지면 휘감아돌고, 때로 서로 순서를 바꿔가며 작용함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한쪽으로 치우치려 하면, 어느새 다른쪽에서 밀려 들어와 균형을 잡도록 해주는 것이 태극이다. 땅이 넘치면 하늘이 덮어오고, 하늘이 무너질 듯하면 땅이 받쳐준다. 그것이 태극의 이치요, 태극권의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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