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희씨 가방을 들어줬던 무술배우의 추억

이찬 대한태극권협회 창립자

2020. 11. 23 by 정리=최윤호 기자

오래전 한 무술영화에 출연했던 필자(왼쪽). 지금은 제목도 잊은 여러 영화에 이런저런 형태로 참여했었다. 오른쪽 사진은, 지금은 고인이 된 신성일 씨와 당시 한국 대표 미인이던 장미희 씨가 함께 출연한 '별들의 고향'의 한 장면 — 오래 전 소림권을 연마하던 시절, 나는 영화판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했다. 무술감독, 제작부장도 하고 무술하는 조연으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한 영화를 찍던 어느 날, 신성일 장미희 씨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었다. 스타를 따라다니며 이것 저것 챙겨주는 로드 매니저가 따로 있지 않던 시절. 대배우 장미희 씨가 가방을 무겁게 들고 있었다. 살벌한 싸움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던 소림권 고수로서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꼿꼿하게 서 있었는데, 갑자기 영화판의 선배인 신성일 씨가 “숙녀가 무거운 것 들고 있는데, 얼른 들어줘라”라고 내게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 쪽으로 아무 생각도 없던 나는 당황해 가방을 들어줬다.딱 그 장면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데, 당시의 내 마음 상태가 어땠는지도 함께 떠오른다. 소림권을 비롯한 외가권의 강인함에 빠져있던 내게 중요한 것은 강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었다. 오직 잘 싸우고, 최고의 강한 자가 되는 것. 그게 무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오래전 한 무술영화에 출연했던 필자(왼쪽). 지금은 제목도 잊은 여러 영화에 이런저런 형태로 참여했었다. 오른쪽 사진은, 지금은 고인이 된 신성일 씨와 당시 한국 대표 미인이던 장미희 씨가 함께 출연한 ‘별들의 고향’의 한 장면

강하고 딱딱하고 오직 앞만 보고 뛰어가던 외가권 수련자였던 내가 삶의 깊이와 동작의 유연함, 우주와 나의 조화에 대해 생각하고, 옆의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나로 바뀌었다. 나의 삶을 치유해준 것이 바로 태극권인 셈이다.

태극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운 몸과 마음을 가져다 주는 수련. 국내 태극권의 여러 문파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태극권의 정신을 나누고 있다.

싸움을 버리고, 공생을 찾아

요즘도 우리 태극권 도관에는 싸움을 위주로 생각하며 수련하겠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는 늘 말한다. “일생에 한 번 써먹을까 말까 한 싸움 방법이나 익히고 거기 매달린다면 얼마나 시간의 낭비인가. 자신을 수련하고 심신을 수양하는 과정에서 무술이 향상된다면 좋겠지만, 그 순서가 바뀌면 인생의 낭비가 될 수 있다.” 꼭 그럴 거라면,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생활과 관련지어서도 그렇다. 우리가 오직 앞만을 바라보고 돌진하다 보면, 자신이 부러지거나 주변에 상처를 남기게 된다. 어느 정도 성과를 쉽게 올리기는 하지만, 오래가기는 어렵다. 너무 힘이 들기도 하고, 스스로 견디기도 어렵다. 그래서, 다른 쪽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건강과 관련지어서도 그렇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운동을 하는가. 어떤 사람은 직업으로 특별한 목적이 있어 운동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일반적 사람들은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몸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한다. 우선 순위가 바뀌면 잘못되기 쉽다. 오래 지속하기도 어렵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면서 몸짱, 옷태, 다이어트 같은 다른 결과를 얻으면 더욱 좋은 것이다.

태극권은 바로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가권이다. 외가권을 익힐 때, 나는 주변사람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나를 낮춘다는 게 뭔지도 몰랐다. 대배우든 미녀스타든 내가 뭔 상관인가? 내가 최고다! 이런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런데, 태극권을 만나고 난 뒤,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알게 됐고, 강함이 아닌 유연함의 힘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