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은 산악 같이, 움직임은 강물처럼


이찬 대한태극권협회 창립자

2020. 05. 15 by 정리=최윤호 기자

정여산악(靜如山岳) 동여강하(動如江河).

고요함은 산악과 같고, 움직임은 강물과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태극권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기의 수련을 중시하는 무술 대부분이 강조하는 움직임의 요령이다. ‘태극양의 사상팔괘’로 시작하는 팔자가(八字歌)의 한 구절이다.

천지는 음양으로 나뉘어 그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움직임은 곧 양이요, 고요함은 곧 음이다. 펴는 것은 양이요, 굽히면 음이다. 강한 것은 양이며, 부드러운 것은 음이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고, 너무 부드러우면 쇠약하다. 강함과 약함은 서로 따르고, 섞이어 함께 쓰이니, 금석같이 견고하고 버들가지처럼 부드럽다. 공허 속에 실함이 있고, 실함 속에 공허가 있다. 적의 허는 나의 실이니 이를 적용함은 마음에 있다. 움직임은 강물과 같이, 고요함은 산악과 같이 한다.

이렇게 이어지는 팔자가는 태극권과 함께 대표적 내가권인 팔괘장의 원리를 설명하며 만들어진 노래라고 한다.

태극권의 원리를 담은 서화. 태산 같이 고요하고, 강물 같이 움직이라는구결을 담고 있다. / 이찬태극권도관
태극권의 원리를 담은 서화. 태산 같이 고요하고, 강물 같이 움직이라는구결을 담고 있다. / 이찬태극권도관


바람처럼 물처럼… 유연함이 태극권의 원리

태극권의 움직임은 하체를 태산과 같이 땅에 뿌리를 박은 상태에서 공력을 쌓고 상체를 부드럽게 바람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며 공격과 수비의 변화를 이뤄가는 원리가 기본이다. 그래서 이 말, 고요함은 산악과 같고, 움직임은 강물과 같아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사실 바람처럼 물보다 더 부드러워야 하는 것이 옳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오래전 외가권을 익히고, 태극권과 만나 어느 정도 익혔다고 자부할 때 대만에 계신 고수 한 분과 손을 맞댄 적이 있는데, 그분의 상체를 밀 때, 마치 공기를 미는 듯한 느낌, 빨래줄에  늘어져 있는 고운 빨래를 미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태극권의 오묘한 세계의 한 부분을 깨달았다.

움직일 때는 손과 다리가 허리를 따라 움직일 뿐 아니라, 머리와 시선이 모두 허리를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상체 즉 팔과 허리의 움직임이 마치 강물이 흐르듯 유연하게 끊기지 않고, 들쭉날쭉하지 않고 유장하게 흐를 수 있다. 팔에 힘을 주고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라. 한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연결될 때 끊어지고, 출렁이지 않겠는가.

고요하게 기다릴 때의 움직임을 침잠이라고 한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가라앉히는 것이다. 기운을 가라앉히면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땅과 하나가 되어, 땅의 기운을 내것처럼 만들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가라앉힌다. 상대의 공격이 와도 마치 감전되는 전기를 땅속으로 흘려버리듯 상대의 기운을 흡수하고 침잠시킨다. 그리하여, 쌓인 기운을 적에게 쏘아낼 수 있는 공력이 생기게 된다.

거대한 산악과 같은 고요함, 흐르는 강물 같은 유장함, 그것은 태극권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좋은 가르침이다. / Unsplash
거대한 산악과 같은 고요함, 흐르는 강물 같은 유장함, 그것은 태극권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좋은 가르침이다. / Unsplash


망치로 못을 박을 때처럼, 생활 속 유연함 기억하자

못을 박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무엇으로 못을 박는가? 망치다. 주먹이나 손, 팔이 아니라 망치로 못을 박는다.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망치를 휘두르면 어찌될까. 제대로 맞추기도 어렵고, 못에 큰 힘이 전달되지도 못한다. 못이 퉁겨져 나가거나, 못을 잡고 있는 손가락을 다치기 십상이다. 신기하게도 힘을 다 빼고, 망치 머리의 무게를 믿고, 툭 던지듯 쳐야 힘이 망치에서 못으로 제대로 전달된다. 그래야 못을 제대로 박을 수 있다.

힘을 빼는 것은 생활 속에서 아주 중요하다. 못질처럼 제대로 힘을 쓰기 위해서도 그렇고, 근육의 손상과 무리를 막기 위해서도 그렇다. 특히 환우처럼 근본적으로 체력이 저하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무리하게 힘을 주는 것보다는 원활한 움직임을 확보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생명을 건 스트레스 상황에서 지나친 긴장은 심적 스트레스를 몸의 통증으로 연결해 줄 뿐이다. 그래서 쉴 때는 아주 고요히, 태산을 생각하며 침잠하고, 움직일 때는 물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부드럽게 해야 한다.

사실 무슨 일이든 이렇다. 이런 방법의 생각과 수련이 쌓인다면, 어떤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단순한 여덟자의 구결을 읽고 생각하고 가끔 되뇌는 것만으로도 작은 변화가 시작될 지 모른다.

정여산악, 동여강하. 고요함은 태산같이, 움직임은 강물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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